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우에노 지즈코, 스즈키 스즈미
-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와 대학생 때 유흥업소 직원, AV 배우 등으로 일한 후 사회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작가 스즈키 스즈미가 ‘연애와 섹스’, ‘결혼’, ‘남자’, ‘엄마와 딸의 관계’, ‘연대’와 ‘자립’, 그리고 ‘페미니즘’ 등을 주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엮은 책이다.
- 편지글 형식으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 페미니즘을 어렵고 무섭고 골치아프다는 이미지롤 가지고 멀찍이서 바라본 나같은 이들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았다.
- 스즈키가 남성과 성산업에 대해 가진 자신의 모순적인 생각들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부분에서 나 또한 나의 과거를 짚어보며 왜 내가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았는지, 왜 전 남친과 대화를 할 생각도 없이 먼저 배려하려고만 했는지, 그래서 내가 후에 느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 앞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데 어떤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도 남성에게 절망했었구나 그런 걸 깨달았다.
- 스즈키씨는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신은 남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듯 남성의 변화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그녀의 편지 내용에는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같은 여자를 공격하거나 깔보는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하는 인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런 여성들 간의 반목과 연대, 모순은 고민할 가치가 있고 충분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녀가 믿기 때문이란 느낌을 받았다.
엄마의 모순도, 저의 모순도, 연애에 미친 친구들의 모순도, 여자의 어리석음도 제가 다루는 주제이고 제가 작가일 수 있는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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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몸을 팔면 안 된다니 그따위 걸 누가 정한 거지?’하고 묻는 정신성으로 밤의 세계에 대담하게 발을 들였는데, 어쩌면 실은 몸을 팔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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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노씨가 스즈키씨의 치우치고 편협한 생각을 보완하는 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예시로 들며 해당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전체 논의의 균형을 잡아주어서 좋았다.
‘육체와 정신을 시궁창에 버리는’ 섹스를 했을 무렵 대체 저는 뭘 한 걸까요? … 성욕보다는 나의 신체가 나의 정신(저는 ‘정신’ 대신 ‘관념’이라고 하는데)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그런 섹스를 했다 싶습니다. … 성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고 성은 사랑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 여자도 성욕을 갖고 섹스를 하며 여자도 성에서 능동적일 수 있다는 점 등등 제가 행동을 통해, 몸을 써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 179-180
- 우에노씨가 해당 주제에 대해 말하며 인생을 더 넓고 길게 보라는 말이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아 위안이 되었다. 스즈키 씨가 30대 중반일 때였기에 나와 나이때가 비슷해서 그녀에게 전하는 말이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던 것도 이런 느낌을 받는 걸 도왔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세요.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세요. 한 사람의 존엄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자신에게 정직할 것,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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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제가 연애를 안 하기보다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은 연애 속에서 자신과 타자에 대해 이것저것 배우기 때문입니다. 연애는 스스로의 욕망, 질투, 지배욕, 이기심, 관대함, 초월을 가르쳐 줍니다. 연애란 상대의 자아를 빼앗고 스스로의 자아를 포기하는 투쟁의 장소입니다. … 그 과정에서 아무리 해도 타자에게 맡길 수가 없는, 지키기 위태위태한 자아의 방어선과 더는 들어가선 안될 상대방의 경계선을, 자신도 타인도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가까스로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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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말기에 이 사람들(카사노바 증후근이나 색을 밝히는 ‘님포마니아’라 불린 남녀)한테 “여태까지 히본 최고의 섹스는?”하고 물으면 답이 공통적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마음이 잘 통한 섹스”라 평범하게 답하죠. … 성과 사람이 일치한 섹스의 질이 다르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섹스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걸 아는 겁니다. … ‘고작 섹스이고, 고작 연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보답만 얻게 될 겁니다. 사람은 자신이 구한 것만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 98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편이, 욕망받기보다 욕망하는 편이 훨씬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 100
성으로 이어진 인연은 선택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취소도 할 수 있지만, 혈연으로 이어진 인연은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인연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인연을 맺을 수도 풀 수도 있다면 어떨까요…… 이런 몽상은 해방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악몽이 될 겁니다.
- 124
그런데 낙인이라고 해도, 이제 예전에 AV 배우였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과거입니다. 인생은 길어요. 스즈미 씨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 경험만이 오늘날의 스즈미 씨를 만든 게 아니니까요. … 게다가 세상은 남의 과거 같은 거 일일이 기억하지도 않아요. … 당신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 더 중요합니다.
- 355
돈이 되는 일이든 안 되는 일이든 최대의 보수는 자신의 성취감입니다. 그걸 맛보면 습관이 들어서 헤어날 수가 없게 되죠. 제가 연구에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239
- 신랄하던 스즈키씨의 성산업과 남성에 대한 관념이 뒤에 가서 다음과 같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마주보는 작업을 우에노씨와의 편지 왕래에서 해냈던 듯 보인다.
사람들이 성매매를 혐오하고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거나, 혹은 부모가 딸한테 매춘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단지 몸 파는 일이 천박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 자존심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라기보다, 성매매로 인해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딘가에서 뒤틀리는 것에 대한 위기감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304
‘남자란 것들은 변하지 않아’라고 느끼는 그 시점에서 페미니즘은 말라비틀어지고 공허한 울림이 돼버리는 것 같습니다.
- 306
- 우에노씨가 말한 생각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왔을지 궁금해서 앞으로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페미니즘에 대한 긍정은 어떤 매력을 그곳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페미니즘은 ‘내가 나이기 위해 남자의 승인 따위 필요 없다’고 주장해 온 사상이었습니다. … 프롬이 확실히 말했죠. 사랑을 하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라고. 그리고 능동적인 행위야말로 자율성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주는 것만큼 풍요로운 행위가 또 있을까요? 이런 행위의 보답은 남이 내게 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보답일 겁니다.
- 156
일상을 살아내는 순간에 여성이 조금이라도 부자유스로움을 느낄 때, 설령 그런 부자유스러움이 남성들의 성차별 때문이라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해도, 페미니즘에는 실제로 나를 구해줄 사상이 있다고 여기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 278
스즈미 씨는 몇 번이나 제게 물었지요? ‘어째서 남자들한테 절망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 믿을 만한 사람과 만났을 때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안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무구한 것,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은 관계에 달려 있어요. 악의는 악의를 끌어내고, 선량함은 선량함으로 보답받습니다. 권력은 알아서 눈치보고 슬슬 기는 아첨을 불러오고, 무력함은 건방진 오만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 285
페미니즘은 이러한 이단 심문이나 마녀사냥을 피해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이란 스스로 깨닫고 알리는 ‘자기 신고 개념’이기 때문입니다.페미니스트란 이름을 내건 사람은 모두 페미니스트지, 올바른 페미니즘이 따로 있고 틀린 페미니즘이 따로 잇는 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중앙 조직도 없고 교회도 없고 성직자도 없는, 한마디로 중심이 없는 운동입니다. 누구누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이단으로 판정한 사람도 없고, 그래서 제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페미니즘이란 어떤 물음을 제기했을 때 정답이 바로 나오는 그런 자동기계장치가 아닙니다. … 저는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내건 간판을 내릴 생각도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나나ㅡ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여성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말 대부분은 누군가한테서 빌린 것입니다. … 논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스스로 단련하면서 ‘나는 여성들한테 빚을 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왔죠.
- 297-299
- 특히 우에노씨가 사회변화에 대해 한 말은 전에 장애/동물권 활동가로 20년 가까이 일해온 홍은전 작가의 “나는, 동물” 북토크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어서 흥미로웠다. ‘사회는 그 겉모습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한계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해당 편지에는 자세히 나오고 있지 않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뭐가 변했을까요? 세상의 겉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번혁이란 속마음까지 다 변화하는 게 아니라 겉모습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한계라고도요. … 인간의 비열함이나 잔학성, 우월감이나 질투심 등을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 319-321
- 나는 페미니즘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 계기가 그동안 장애학 책읽기 모임을 하면서 본 여성학자들의 몸과 젠더에 대한 풍성하고 깊이 있는 시선 덕이었다. 이 책에서는 깊이 있는 몸과 장애에 대한 논의가 있진 않았으나 분명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여성학만이 가지는 시선이 있지 않을까 예감을 가지게 했다.
남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인데, 장애인은 남을 만나기 이전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자로서의 내 몸을 만나야 합니다. … 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정신도 몸도 부서지는 것이라 느끼게 됐습니다.
- 187
정보 공개와 절차의 투명함에 따른 학자 상호 간의 비판과 공정함을 믿으므로, 저는 학문이란 세계에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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