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동녘, 2022

2010년 피해자로 혼자 싸워야 했던 시간이 D가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연대를 시작한 이유이다. 홀로 처절히 싸워야했던 과거의 내게 손을 내밀기 위해. 그 시간이 얼마다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까지 해낼 수 있었을까.그 마음이 느껴져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다른 피해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2010년의 그때, 혼자 남아 있던 나를 피해자들에게 투영했다. 연대를 통해 과거의 내게 손을 내밀고, 그때의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나는 무결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그래도 된다. 난 가해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관용의 최대치다. 나는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며 시스템을 바꾸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마녀’로서 내가 가해자를 사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냥을 멈출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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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자는 어떤 존재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연대자로서의 나를 피해자의 그림자로 표현한다. 그림자는 본체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연대의 기본은 본체인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는 그 길이와 방향을 통해 본체가 시간과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피해자를 위해 때로는 전략을 수립하고, 특정 방향을 선택하도록 권하며, 앞으로 나서기도 한다. … 나는 피해자가 문제를 인식한 후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집중적으로 연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사법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따라서 내 모든 연대는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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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험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앎을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전공자나 관련 자격증이 있는 이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바로 ‘주제 파악’이다. 내가 할 몫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며, 전문가와 협업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해야 피해자에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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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유난히 읽기 힘들었던 장은 ‘3장 또 다른 톱니바퀴들’이다. 경찰, 검사, 판사, 피해자/피고인 변호사, 언론사, 연대자를 빙자한 착취자 순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을 이루는 톱니바퀴들이 어떻게 피해자를 고립시키는지가 비슷한 문제를 반복하며 보여진다. ‘톱니바퀴’라는 표현은 지금의 사법 시스템을 움직이는 이들을 그 어떤 단어보다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피해자는 성폭력이라는 사건으로 무너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신뢰가 ‘피해자 재판’을 하는 사법 시스템에 의해 다시 한 번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왜 저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는지 소위 전문가들이라 불리나 그 어떤 연대자보다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역할에는 무능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보는 피해자와 연대자의 무기다. 알고 보면 다르다. 알고 비판하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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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한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알아야 비판도 싸움도 제대로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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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므로 연대자들은 피해자들을 살리는 유일한 힘이 될 때가 많다. ‘실제로 2020년까지는 하루에 수면 시간이 두세 시간에 불과했다.’라는 저자 D의 고백처럼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연대의 범위를 넘어선 시간과 돈을 들여서 그녀는 2014년부터 연대를 해나갔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연대를 해나간 시간이 이 책에 고스란이 담겨 있다. 이 많은 분량에 ‘성폭력 재판을 피해자 재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는 문장을 구체적 사례들에서 계속 마주치게 된다. 속이 답답해질 만큼 억울한 재판 기록을 보며 왜 D가 스스로를 마녀라고 내세우며 연대를 그만두지 못하고 이어가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2010년의 내게 현재의 내가 연대자로 있었다면 방청은 내가 할 테니 좀 쉬면서 회복하라고 했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과 공포 속에 혼자 내던져졌던 나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연대를 이어나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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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내가 피해를 입고 문제를 해결했던 기간인 만 4년에 맞추어 연대 활동을 기획했다. 혼자서 힘들었던 시간만큼 사회에 돌리면 내 몫은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이나 활동에 온 생을 바치는 숭고한 이들처럼 될 수도 없고, 될 생각도 없었다. 난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 누워 있으면서 ‘대체 가능한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내가 연대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0년 이후 내 역할을 ‘연결어미’로 잡았다. 피해자이자 활동가로서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마녀’라는 활동명을 버리고 ‘연대자 D’로 활동명을 바꾼 후부터 간접연대 비중을 늘린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D’라는 활동명은 한국어 형용사의 연결어미 ‘-디’에서 따온 것이며, 이는 기본적으로 그림자나 가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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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미나를 굳이 개인 자격으로 여는 이유는 단순하다. 2010년에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자 싸워야 했던 내 옆에, 지금의 나 같은 연대자가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함께 했다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연대를 할 때 피해자였던 내 상황을 돌이켜 본다. 수사/재판의 절차에 대해 알고 싶어도 일반인인 내 시각과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전문가 한 명 만날 수 없었던 상황, 물증 확보가 어려운 피해자가 지연 고소를 할 때 어떤 지원과 조력을 받을 수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그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자 여기저기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전략을 세우고 자료를 만들던 그 시간. 형사사법 절차에 대한 이해가 곧 수용과 납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알고 있으면 적어도 싸움과 포기 모두 피해자 본인의 선택지로 충분히 고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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