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가야 신이치로, 재활의 밤 리뷰
“구마가야 신이치로 지음, 조승미 옮김, 재활의 밤, 동녘, 2025”에 대해 당장함께 세미나에서 26.02.10 나눈 이야기를 나의 감상과 엮어 정리해본다.
구마가야 씨는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사용하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는 저자이다. 그는 자신의 재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을 만들어낸다. ‘관능’과 ‘줍다’와 같은 단어가 대표적이다. 각각이 쓰인 의미와 예시를 보자. 먼저 관능은 ‘패배의 관능’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관능: ‘육체적 쾌감’을 뜻하는데, 이 책에서는 저자가 재활이나 세계와 자신의 관계, 자신의 신체성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할 때 두루 썼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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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상대가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상관없이 압도적인 힘으로 (그러나 안전하게) 패배하는 것에 일종의 관능을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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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다’는 ‘풀면서 서로 줍는 관계’처럼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몸이 주워진다는 표현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해 신선하다. 이 단어가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줍는 주체와 주워지는 대상을 상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줍다: 저자의 특정한 움직임에 대해 외부세계(사물이나 타자 등)가 적절히 반응한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어로는 ‘받아들이다’, ‘받아들여지다’가 가장 원뜻에 가깝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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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과제 훈련 후에 하는 스트레칭 같은 ‘가해/피해 관계’에서 내 몸이 방치될 때’를 ‘줍다’는 동사를 통해 표현한 대목이다.
몸을 빼앗기고 공중에 떠 있는 ‘나’는 누구의 몸에도 좌표를 고정할 수 없는 유체이탈 상태이다. 누구도 내 운동을 줍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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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움직임은 혼자일 때조차 사물과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구마가야씨는 움직임을 관계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람이라서 이처럼 ‘줍다’와 같은 표현을 독창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보인다.
1단계와 2단계에서 보여주는 사실은 ‘의지라는 주관적 경험에 앞서 뇌 속에서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운동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발견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나는 특히 3단계와 4단계 사이에 주목했다. 우리는 실제로 몸을 움직이기 전에 자기 몸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다! 4~5단계를 보면, 일차운동피직에서 운동 명령이 온몸의 근육을 향해 나온 후 실제 운동이 대뇌피직에 피드백되기까지 0.2~0.3초 정도 시간이 지연된다(감각 정보가 대뇌피질에 도달한 후 의식으로 떠오르기까지는 추가로 0.5초가 걸린다). 이는 움직이라는 명령과 움직였다는 피드백 정보 사이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신간차가 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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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이 세상을 인지할 때 뇌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설명하는 부분이다. 뇌에서는 ‘예측수행’이라는 것이 발생하는데 아직 몸이 움직이기 전에 마치 몸을 움직인 것처럼 ‘거짓 고유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 모델은 마치 ‘꿈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고 구마가야 씨는 말한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놀랍게도 비장애인이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은 결국 꿈 속을 살아가듯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예측대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는 피드백 여부에 따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각을 수정한다. 예컨대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문득 발이 허공을 디딘 것 같이 착각하는 순간이 예측과 실제의 괴리가 생긴 순간이다. 이러한 피드백이 쌓이면 예측을 수행하는 내부 모델이 점점 실제에 맞게 정교해질 것이다. 특정 움직임을 반복한다면 해당 움직임을 담당하는 뇌의 시냅스 연결이 강화되어 나중에는 특정 종류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무의식 중에도 나오는 것이리라.
뇌의 내부모델에 관한 설명은 바로 전에 읽은 “발달장애 당사자 연구”를 떠올리게 했다. 세미나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있었다. 아야야 씨의 당사자 연구를 보면서 언어소통 장애를 가졌다는 그녀가 비장애인보다 세상과의 소통에 더 열려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둔 건 자폐인인가 비자폐인이가 계속 질문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정상적인 뇌의 작용이 “꿈의 세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자기 몸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상과의 소통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장애 당사자이기도 하겠으나 그는 자신의 몸의 움직임과 한계를 정확해 알고 있구나 감탄했다. 구마가야 씨는 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서도 세상과 소통하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을 능동적으로 열려고 애쓰면 점점 더 닫힌다. 그러므로 큰 힘에 수동적으로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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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내 협응 구조가 풀리면서 내 몸 안에 놀이(각 신체 부위 사이에 근육이 느슨하게 묶여 있는 관계)가 생기고, 주변에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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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세미나에서 이 책에서 재활의 경험을 당사자 위치에서 말해주는 부분이 좋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구마가야 씨는 자신의 재활의 경험을 관계의 문제로 정의한다. 치료자 중심으로 재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1970년대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비장애중심적인 움직임을 강요당했던 경험이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치료자와의 관계는 서로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특히나 여기서는 장애 당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 움직임이 스스로의 의도대로 제어 가능하고 힘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치료자의 의도에 따라 다음의 3가지 관계로 나뉘어진다.
- 풀면서 서로 줍는 관계
- 상대방의 움직임을 상상해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트레이너의 움직임을 좇아 트레이너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트레이너 몸의 풍경을 상상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시선을 공유한다. 이처럼 연결되고 있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하나의 대상을 향한 복안, 다층적인 다른 시선을 가진다는 점에서 객관적을 갖춘 시점을 융화하는 시선이라 한다.
- 응시하고/응시당하는 관계
- 내 몸은 일방적으로 시선을 받는다. 트레이너는 내게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나는 시선을 되받아칠 수가 없다. ’이것이 올바른 움직임이다’라는 강하고 확고한 명령의 눈길을 따끔하게 느끼며 초조해하면 초조해할수록 그 명령에서 벗어난 내 몸의 움직임이 또렷이 드러난다. 이 재활의 장소에서도 운동 목표를 벗어나게 되리라는 초조함, 야기되는 패배에 따른 치욕스러움. 이런 감정은 고조된 신체 내 협응 구조가 에너지로 바들바들 방출되는 듯한 쇠락의 관능을 동반했다.
- 가해/피해 관계
- 신체 부위가 분리되어 통일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간다. 신체 대부분을 트레이너에게 빼앗기고, 내 신체에서 오는 정보도 받지 못하는 상태로 누구의 몸에도 좌표를 고정할 수 없는 유체이탈 상태이다. 누구도 내 운동을 줍지 않기 때문에 감각이 입력되더라도 나의 운동계획과는 무관하다. 운동계획으로 감각입력을 예측하는 내부 모델은 작동하지 않는다.
‘재활’의 경험이 비장애 신체와 규범을 강요하는 ‘가해/피해 관계’가 아니라 ‘풀면서 서로 줍는 관계’가 되려면 무엇보다 치료자가 규범을 벗어난 장애 당사자의 움직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중간에 ‘뇌성마비 재활의 사회사’란 칼럼에서 ‘장애 수용’이란 개념이 1970년대 재활 현장에서 운용되는 방식의 문제가 인상적이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치료사 중심의 비장애중심주의가 잘 드러나는 예시이다.
작업치료사 다지마 아키코는 ‘장애 수용’이라는 말이 일본의 재활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지적했다. 다지마에 따르면 클라이언트가 ‘기능 회복을 고집할 때’, ‘(복직 지원 시기 등에) 자신의 능력이나 적성에 대한 인식이 (치료사 쪽에서 보기에) 적절하지 않고 과도한 기대를 나타낼 때’ 이 두 가지 경우에 치료사는 클라이언트를 두고 “장애 수용이 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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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대안으로 구마가야 씨는 ‘복안’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복안: 단안의 반대말로 융화하는 시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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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복안은 소수자의 시선이다. 왜냐하면 소수자는 자신들에게는 없는 규범의 시선을 또 하나의 시선으로 인지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복안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시점에 따라 다 달라진다. 퍼스펙티즘은 육식자에게는 고기가 비건에겐 살로 보인다. 경험이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그런 시선을 얼마나 다양하게 가질 수 있나. 얼마나 많은 규범을 가질 수 있는가. 사람이 성숙해진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이 바로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신체가 지닌 뇌성마비 특징을 신경학의 용어 ‘경축(강직)’이나 ‘경직성 마비’로 이야기하지 않고, 운동학의 ‘협응’ 개념으로 말한다. 협응이란 수행하려는 움직임의 목적에 따라 사지, 신경과 근육 관절 등 다양한 신체 부분이 고동으로 작용하는 형태를 말한다. 저자는 생리학자 니콜라이 베른슈타인이 고안한 용어 ‘협응 구조’을 차용해 자신의 상태를 “과한 신체 내 협응 구조’로 인해 몸에 놀이(여유, 느슨함)가 없는 상태”라고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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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교섭’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을 본 느낌이다. 협응 구조가 매끄럽게 되지 않는 영역이 있고 사물과 새로운 교섭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간다. 고치고 나를 변형하고의 반복.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나를 바꾼다. 나와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법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과 교섭한다. 번역의 과정과 비슷하다. ‘책’이란 단어와 영어단어 ‘book’사이엔 그 어떤 관련성도 없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둘을 같다고 가정하고 바꾼다. 미리 주어진 모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는가. 그것은 틈에서 생겨난다. 그 틈이 새로운 움직임을 낳아준다. 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변형할 수 있는가. 거기서 역량이 생긴다. 여기에 교섭이란 단어를 잘 썼다.
실금에는 스러지는 황홀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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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실금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특히 이 사람은 어디까지 솔직할 건가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읽었다. 그의 발언이 불편한 건 그가 꼭 섹스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상과 재활을 경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에게 성적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장애 당사자가 성적인 맥락이 느껴지는 도발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므로 그의 솔직한 발언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불러온다. 긴장하면서 글을 읽어나가게 된다. 그의 경험을 긍정하기 위해서 내 안의 어떤 금기를 깨야하는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성, 실금, 변의 담론은 꼭 장애가 아니라도 이게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꾸 되묻게 한다.
나는 초심자를 춤으로 유도하는 프로 댄서처럼, 긴장한 실금 조력자를 다정하게 에스코드해야 한다.
- 282
의존과 돌봄에 관련한 이야기에서는 결국 얼마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많은가가 비장애인을 장애인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예컨대 움직임만 놓고 볼 때 도마뱀은 자연에 잘 적응한다. 인간이 이렇게 움직이면 장애인이다. 한편 수나우러가 엉덩이를 보일 때 상대의 반응에서 수치를 느낀다는 일화도 떠올랐다. 엉덩이를 보이는 행위 때문이 아니고 상대의 반응 때문에 내가 수치를 느낄지가 결정된다. 정의, 권리 등의 용어는 국가와는 맞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이라던지 갈등을 해결할 땐 도움이 안된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기존의 남성 장애인의 성은 숨기고 안하는 척하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구마가야씨는 포르노, 숨겨서 하는 성매매 등등의 진부한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 저자는 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순서로 주목하지 않는다. 억압한 권력이 성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장애는 성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구마가야의 시선은 자기 몸에만 시야가 한정되지 않는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으므로 그의 몸은 항상 사물 또는 사람과 연결되는 방법을 궁리하고 찾아내며 이로써 몸이 확장되어 나간다. 이런 연결이 다음과 같이 차원을 넘나드는 경험을 만들기도 한다.
전동 휠체어를 타는 행위는, 신체와 신체 부위 주변 공간을 동시에 확장하고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더 넓게 연결하며 시간의 흐름도 더 빠르게 만든다.
- 5장 움직임의 탄생, 1. 사물과 함께 만들어 내는 움직임
부서지고 실패할 때 오히려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열린다. 나의 경우 최근 크레브마가를 배우고 있는데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내가 목표한 곳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못했을 때 선생님이나 수강생과 같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친절을 내가 불쌍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수치스러워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서 내 자신을 구마가야 씨 표현을 빌리면 부셔버리는 경험이 많았다. 구마가야 씨의 이야기는 그래서 내 몸의 움직임을 내 한계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만들어가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내가 잘라서 목표한 동작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목표를 향해 합을 맞추어나가고 실수하면 그 부분을 더 연습하고 설명을 보완해나간다. 그렇게 목표한 동작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건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나는 좌절과 동시에 자유도가 높아지며, 주변 사물이나 사람과 새로운 연결로 열릴 때의 경험을 ‘패배의 관능’이라 이름 붙이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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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맞은 여자애’를 보면서 나는 이 여자애도 ‘패배의 관능’을 즐기는 것 아닐까 싶었다. 내가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벽에 부딪히는 일에서 자신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이런 벽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지점이 있어서 때리는 구마가야에게 다시 맞을 것을 알면서도 다가간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 자신을 정체를 알 수 없어 당황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이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다는 지점에서도 기쁨을 느꼈을 것 같다. 이 책의 칼럼에도 나오지만 ‘패배의 관능’ 부분은 분명 마조히즘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마조히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애매한 지점을 가리킨다. 비판이 쉽게 옳고 그름을 잣대를 나눈다. 규범에 대한 이탈은 결정 불가능한 지대로 마조히즘을 몰아간다. 노예가 맞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면 그건 노예인가? 강함과 약함의 결정불가능성, 패배로서 오히려 우연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마조히즘을 끌고 온 것이 기발하다. ‘안되는구나’할 때의 내가 놓여났다는 쾌감이 있다. 어차피 깨진 꿈, 어차피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동력이 된다. 내 꿈이 규범에 억매이지 않는다. 어떤 가능성이 열리면서 해방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19세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 때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어차피 안된다라는 지점이 있어서 그 결정 불가능한 곳으로 스스로를 끌고 갈 때의 홀가분함 같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에코랄리아”라는 언어학을 다룬 책이 있다. 이 책에는 다음의 일화가 나온다. 인간은 동물보다 열등하다. 그런데 딱 하나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을 해낸다. 새는 음치인 새가 없다. 인간은 음치가 있다. 그래서 배울 수 있다. 약함과 강함의 결정 불가능성. 어떻게 약함이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더불어 규범 이전의 신체을 욕망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에코랄리아에서 실어증을 연구하며 언어의 기원을 발견한 것처럼. 처벌을 받음으로 마조히즘은 순수한 규범 이전의 세계로 가게 한다. 규범 이전의 신체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갈망이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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