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야야 사츠키, 구마가야 신이치로(지은이),유기훈,안병은,봉성균(옮긴이), “발달장애 당사자 연구”, EM실천, 2025
  • 4장부터 마지막까지 범위를 26.01.20 당장함께 장애학 읽기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세미나에서 의사소통 장애인이라는 아야야씨에게 의사소통을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 가장 공감이 되었다. 실제로 나는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4장에 나온 ‘침입’이란 개념을 보니 내가 왜 관계맺기에서 그토록 힘겨워했는지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침입’이란 메커니즘을 설명한 4장을 요약한 내용이다.

4장 흔들리는 타자상, 풀어지는 자기상: 성가신 ‘침입’

사람은 태어나고서 ‘타인’의 패턴을 자기 자신에게 입력하며 후천적으로 자기 자신의 패턴을 정립한다. 자폐라 할지라도 패턴의 정립은 불가결하다. 나의 경험상 ‘타인으로부터 패턴을 입력하는’ 현상은 자아와 상성이 좋은 ‘타인의 패턴’이 나 자신도 소화해낼 수 있는 것으로서 입력되는 ‘수확’과, 타인의 의도가 자아를 침식해 온다고 느끼는 ‘침입’으로 나눌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수확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일쑤이고, 침입이 용이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타인의 패턴에 접촉했을 때 자신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잠재화시키는 ‘배제’ 또한 일어나기 힘들다. 이 장에는 나에게 있어 ‘침입의 일어나기 쉬움’을 이야기한다. 타인으로부터 패턴이 침입할 때는 ‘행동 정립 패턴의 침입’과 ‘의미 정립 패턴의 침입’ 두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행동 정립 패턴의 침입

동작의 침입

나에게는 타인의 표정이나 동작, 말투의 버릇 등이 침입하기 쉽다. 자신이 지금까지 사용해 본 적 없는 근육을 움직이고, 기억된 표정이나 동작을 만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를 표출해 버렸을 때에는 그것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고 기분이 나빠진다. 이때 침입이란 타인의 패턴이 그대로 나 자신의 패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패턴의 선택 리스트’에 추가되는 것이며, 매회 같은 장면 하에서 내가 항상 그 동작을 고르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욱이 그 새로운 선택지는 단순히 나의 선택지 항목을 늘릴 뿐 아니라 긴 시간 축적에 따라 겨우 패턴화시킨 ‘어느 장면에 있어서의 내 동작 패턴’을 손쉽게 부셔버리기 때문에, 나는 늘어난 선택지 안에서 새롭게 손을 더듬어 하나의 동작을 고르는 신세가 된다. 새로운 선택지는 나의 부담을 늘리는 불편한 것이지만, 더욱 좋지 않은 점은 새로운 선택지는 선명한 기억이기에 선택지의 최우선 순위에 놓인다. 천천히 신중히 선택할 때는 최우선 선택지를 기각할 수 있지만, 푹 쉬며 긴장감이 없을 때나, 반대로 재촉 받아 너무 긴장했을 때에는 무의식중에 최우선 선택지를 골라버린다. 그리고 이를 지적받고나서야 나 자신의 행위를 눈치 채게 되어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캐릭터의 침입

캐릭터는 의도나 의지, 눈빛 등을 갖는 존재로, 동작이나 표정, 말투 등을 하나로 정리하고 있는, 상위의 큰 틀에서의 ‘행동 정립 패턴’이다. 타자의 행위나 말투를 종합적으로 자세히 보는 것으로 인해 캐릭터가 침입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자신의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침입해 온 타인의 캐릭터를 이물로서 계속 느끼는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캐릭터의 침입을, 나는 관람차에 빗대어 ‘곤돌라가 밀어닥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중심부의 나(자아)를 둘러싸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캐릭터가 곤돌라로서 존재하고 있다. 양자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나를 위협하지 않지만, 집단 속에서 사람을 바라보며 관찰하게 된 경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한 경우는 제각각의 곤돌라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커져서는 중심부에 있는 나에게 덮쳐온다. 고통스런 나머지, 사람과 만난 후엔 누워서만 지내는 생활이 4-5일 이어진다.

의미 정립 패턴의 침입

타자상의 요동

‘타인’과 ‘자신’의 이항관계에 ‘대상물’을 추가해, 삼항관계에서 ‘의미 정립 패턴’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중개인이 매물을 찾고 있는 휠체어 사용자인 나의 친구에게 의아한 표정을 쏘는 모습을 내가 봤을 때, 먼저 부동산에서 마주한 표정이나 모습들은 분석할 수 없는 선명한 사진 기억인 채 계속 뇌리에 머물러 있다. 그 후 부동산 중개인의 태도와 표정을 떠올리며 그가 차별적인 시선으로 휠체어 사용자인 친구를 보고 있었다는 맥락을 알 수 있다. 맥락을 알고서야 비로소 부동산의 ‘행동 정립 패턴’의 침입이 완료된다. 차별적 눈빛이 닿은 후, 타인의 눈빛이 친구를 대하는 나 자신의 눈빛을 혼란시키는 이물질로서 계속 머물게 된다. ‘행동 정립 패턴’이 침입한 이상, 4-5일은 ‘차별적인 눈빛을 한 부동산 중개인’이라는 ‘캐릭터의 곤돌라’가 나를 덮친다. 부동산 중개인의 눈빛에 의해 친구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들고, 중개인의 눈빛의 침입에 의해 무구했던 나 자신도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들어, 타자상도 자아상도 혼란스러워진다. 자신도 친구도 그 외의 타인도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대인 공포에도 빠져들어 간다. 하지만 4-5일 후, 캐릭터보다 더 높은 계층의 최상위에 군림하는 ‘사령탑’이 판단을 내린다. ‘우리들은 틀린 게 아니야. 틀린 것은 차별적인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야’라는 신념이 혐오감으로 ‘부동산 캐릭터의 곤돌라’를 돌려 보내, 불안은 서서히 분노나 분함으로 변해간다.

자기상의 해이

이와 같은 현상은 나 자신이 차별적인 눈빛을 받았을 때에도 생긴다. 새로운 타인의 눈빛에 의해 나의 ‘자기소개’(자아상)이 혼란해져, ‘행동 정립 패턴’도 흔들렸다. 이물질에 접촉해도 곧바로 ‘이건 내 캐릭터나 눈빛이 아니야’하고 배제할 수 있는 사람이나, 이물질을 오히려 점차 자신의 것으로서 소화해 받아들이는 사람과는 다르게, 나의 경우는 이물질이 이물질인 채 체내에 머문다, 그리고 내가 어떤 캐릭터였는지, 또는 세계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흔든다.

‘평범한 척’의 감각

사람과 만나게 되면 ‘평범한 척’이 필요해져, 나의 본연의 모습인 비사교의 세계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정상’으로 보이도록 행동해야만 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꽤 부자연스럽고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 발생하는데, 외부에서 사교를 강요받는 폭력성을 느끼는 것이다. 일정 기간 ‘평범하게 이야기가 가능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바뀌는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파악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나’라는 어느 하나의 캐릭터로 일관되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지에 대한 미세한 조정에 기운을 배분해야만 한다. 발성법, 말투, 어휘, 이야기의 간격, 말하는 속도, 웃는 방식, 눈 움직임의 조정, 손가락의 움직임. 이러한 수준의 사교는 나중에 나에게 큰 공황을 일으킬 정도의 허들이 높은 작업이다. 타인의 캐릭터의 침입이 ‘식중독’이라면, 사교용으로 만들어낸 스스로의 캐릭터에 의한 침입은 ‘자가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잘 말할 수 있는 자신이라니 역시 거짓말쟁이었어’, ‘그런 식의 나로 있을 것이었다면, 차라리 무리해서 말할 수 있는 척 같은 거 안 했으면 좋았을 걸’하고, ‘1인 반성회’를 하게 된다. 이런 평범한 척을 통해 내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새벽에는 사라져버리고 싶어진다. ‘남으로부터 소외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항상 그 캐릭터로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매번 거기까지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하며 슬프고 힘들어져 오열이 시작된다. 더 이상 누구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아지고, 심할 때는 1주일에서 10일까지도 방에 처박히기 일쑤인 생활을 하게 된다.

타인과의 거리감을 두는 힘이 약한 나를 탓하다가 ‘침입’이라는 메커니즘을 보고는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깨닫게 되고 그래서 나 자신을 자학하는 생각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그것이 당사자 연구의 힘이란 걸 느꼈다.

발성기관의 문제로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은 아야야씨가 수어를 어떻게 소통의 보안수단으로 사용하는지를 정리한 ‘5장 목소리를 대신할 것을 찾아서: 말을 거둠으로써 자유로워지다’는 수어가 비단 청각장애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한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말하는 것’과 ‘발성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고뇌와 불안을 안고 살아온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수어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 시절이 되어서야 겨우 수어를 익힐 기회를 얻었다. 현재의 나에게 있어 수어는 없어서는 안될 언어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 수단으로 수어를 사용하고 있고, 수어로 말할 수 있는 곳을 안식처로 여기고 있다. 내 안에는 크게 두 가지의 말할 수 없는 감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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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아야야씨는 자신의 발성 상태를 다음의 4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도는 시시각각 바뀌는 인적/물적 환경에 의해 ‘초 단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게 변동하고 있었다. 나의 발성 상태 그라데이션을 크게 분류하면 다음의 4단계가 된다.

  1. 수어도 목소리도 사용하지 못하는, 전혀 말하지 못하는 상태
  2.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수어만을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상태
  3. 수어와 함께 더듬대며 말할 수 있는 상태
  4. 남들만큼 목소리만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

2)와 3)의 단계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었다. 즉,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이다.이것은 나의 자유도를 꽤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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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꿈에서 현실로’에서는 아야야씨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얼마나 열려있는 사람인지 보여준다. 특히 ‘달빛’에 반응하는 몸의 반응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장에서 묘사한 대로, 청각 우위의 감각적 특성을 가진 내게 있어 달빛의 세계는 태양 빛에 비해 사물을 비추지 못하므로 시각포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준다. 이럴 때면 청각이나 후각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척을 읽어내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한편 보름달 그 자체로 눈을 향했을 때, 이러한 안정된 감각과는 다르게 격하게 흥분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출산 이후부터는 어둠 속에서 보름달의 빛이 떠올라 일직선으로 나를 향해 비출 때, 내 몸에 어떤 특유의 변화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보름달이 눈에 닿을 때의 자극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볼 때 느끼는 설렘이 극대화된 상태와 비슷하며, 황홀감과 함께 심신이 해방되는 듯한 경험을 동반한다. 그런 감각은 직접적으로 가슴이나 아랫배, 회음부에 닿아 피를 돌게 하며, 마치 일정한 무게를 가진 빛이 몸을 관통해 체내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을 준다. 이러한 몸의 감각이 하나의 ‘자기소개’로 정립된다면, 그것은 ‘성적 흥분’에 가깝다. 그처럼 몸이 시큰해져 올 때면, 마치 달이 나에게 아이를 갖도록 부드럽게 재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178-181

‘7장 ‘소외된 존재들’끼리의 이어짐: 공동 저작에 관하여’에서는 뇌성마비 당사자이며 소아과 의사인 구마가야 씨의 관점에서 이 책이 어떻게 두 명의 저자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말해주고 있다.

나는 뇌성마비 당사자이며 소아과 의사이다. 소아과 의사라 해도 자폐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아동 정신의학에 대해서 수련을 받아온 것도 아니다. 그러한 나와 아야야 씨와의 공동 연구에 있어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오히려 뇌성마비 당사자로서 겪었던 곤란함이다.

  • 190

DSM(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등의 조작적 진단기준과 같이 표면에 나타나는 징후로서 정의되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당사자 체험을 반영하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극도로 축소시키고 있다. 나는 아야야 씨의 말을 신중하게 곱씹는 것부터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즉, ‘아야야 씨의 그러한 감각, 고통이나 기쁨은 자신의 경험에서는 어떤 것에 가까울까?’ ‘정말로 자신의 감각과 같은 것일까’ ‘질적으로 같아도 양적으로는 다른 것 아닐까’ 등의 물음을 던지며, 둘이서 치밀하게 대화를 거듭하여 이 책이 탄생했다. 아야야 씨의 경험을 들을 때마다 매번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의학에 한정하지 않고 정보를 검색했다. 유감스럽게도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우리끼리 용어를 만들어 공유하였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개념은 첫 단서로서 참고는 하였지만, 그 개념에 맞도록 아야야 씨의 체험을 왜곡하는 것만큼은 싫었다. 아야야 씨가 아스퍼거 증후군인 것을 엄밀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야야 씨의 체험을 명확하고 상세하게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 191-192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야야씨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시어머니에게 가사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은 뭉클했다. 늙어가는 자신을 보며 그녀의 주장을 수긍하는 시어머니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원래 열심히 하면 할수록 가능한 범위는 넓어지기 마렵이에요. ‘할 수 있다/못 한다’의 경계선은 미리 그어놓는 게 아닙니다. ‘할 수 있다/못 한다’라는 질적인 이율배반이 아니라, ‘할 수는 있으나, 얼마만큼의 부담이 수반되는가’라는 양적인 문제로 전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므로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214

그녀가 스스로를 자학하는 말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혼자만의 문제로 가두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당사자연구가 왜 그녀 자신에게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더 나아가 그녀의 연구가 자폐는 스펙트럼의 문제이며 따라서 모두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어지지 않은 것도 아닌 문제라는 걸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무지개처럼 펼쳐진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천천히 신중하게 보여주었다. 세미나에서 모두들 이야기한대로 아야야씨만큼 세상에 자신을 열어둔 사람도 없어보였다.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둔 건 자폐인인가 비자폐인이가 계속 질문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세미나에서 ‘자폐’란 용어에 대해 그 대체어가 필요한지에 대해, 그렇다면 그건 어떤 단어이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다. ‘자폐인’이 ‘퀴어’, ‘불구’처럼 당사자들이 다시 가져와 전유해 쓰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를 듣다가 알게 되었다. ‘신경다양성’이란 용어가 ‘다문화’처럼 소수자를 타자화시키며 ‘저들은 문화가 많다’는 식으로 지칭하는 것에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물음도 나왔다. 당장함께에서는 계속 이런 주제가 반복해서 논의되었다. 처음엔 비슷한 말을 자꾸하는 게 어떤 소용이 있는지 잘 와닿지 않아서 이런 대화들이 낯설었다. 그래도 3년이 지금은 이런 논의가 무엇보다 내가 그 용어에 익숙해지고 나의 말하는 방식과 습관을 바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사용하는 단어에 예민한 모임 회원들을 보면 여전히 그 단어에서 차별의 냄새를 예민하게 맡아내는 감각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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