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공감 춤추는허리, “주렁주렁 치렁치렁” 연극 후기
2025.12.17에 관람한 춤추는허리 돌봄추리극 중간과정 발표회 “주렁주렁 치렁치렁“을 본 후기를 정리해본다.

춤추는허리 공연을 직접 보긴 처음이었다. 내가 기존에 알던 연극과는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갔으나 대본이 적힌 카드를 넘기며 대사를 읽는 발달장애인 여성 배우를 무대에서 보는 건 역시나 당혹스러웠다.
그 당혹스러움은 침대에 누워 산소호흡기를 차고 발가락에 묶인 방울을 흔드는 여성과 그녀의 말을 전달해주는 휠체어에 앉은 여성을 볼 때 최고조에 달했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연극’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그럼 대체 ‘연극’이란 뭐지? ‘연극’은 뭔가 배우가 대사와 몸짓을 준비하는 게 기본 아닌가?
공연 당일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언어화해야 할지 몰라 그저 복잡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의 글을 보고서야 내가 왜 공연을 보고 불편했는지 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춤추는허리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배우들의 몸을 보며 긴장하기도 한다. 휘청거리거나 꼬였거나, 부정확한 발음과 타이밍은 공연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건지의 의문을 품게 한다. 넘어질까, 다칠까, 실수할까, 혹은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으로 장애여성 배우의 움직임에 긴장하고 있는 관객들을 발견한다. 관객의 반 응은 흥미롭지만, 장애여성 배우를 긴장시키기도 한다. 관객의 해석을 읽어내며 나를 보이는 공연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진희, 201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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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허리의 몸짓, 표정, 대사는 ‘성공한 공연’, 혹은 ‘정상적 공연’ 자체에 의문과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을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며 연극에 대해 이들이 가지고 있던 통념에 균 열을 일으킨다. 관객의 긴장은 동시에 배우가 긴장하게 되는 조건이 된다.
이와 같은 당혹스러움이 가라 앉게 한 건 연극 중간중간 무대 뒤 벽에 띄워지는 영상이었다. 특히 경순, 성선, 은선님이 장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이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마 영상으로 편집된 이들 모녀의 대화는 내가 익숙한 형식이었기에 별다른 불편함 없이 다가왔던 것 같다.
영상에서 세 모녀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 가운데 자신들이 앓고 있는 ‘샤르코-마리-투스’라는 장애에 대해 같이 대화를 나눈다. 셋이 있을 땐 한 번도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다고 한 말이 의외였는데 나와 내 엄마의 관계를 떠올려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였겠거니 싶었다.
샤르코-마리-투스 병: 말초신경을 형성하는 PMP-22 등의 유전자 중복으로 인해 손, 발 말초신경의 정상적인 발달이 저하되어 손이 굽고 마비가 오게 되는 병이다.
- 출처: 나무위키 샤르코-마리-투스 병
세 모녀 이야기는 “어쩌면 이상한 몸”(2018)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경순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활동가가 처음 그녀를 소개할 때 ‘시큰둥’이란 단어를 썼는데 영상에 나온 경순님은 정말 세상만사에 별 기대가 없는 사람처럼 ‘시큰둥’해보였다.
성선님과 은선님이 돌아가며 경순님에게 질문을 하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졌다. 예컨대 “엄마는 활보(장애인 활동보조인의 준말)님들한테 화장실에서 뒤처리 맡기는 게 미안해 항상 돈 10만원씩 더 주잖아”라고 물으면 “그럼 어떻게, 내 신세가 이런 걸”이라고 퉁명스레 답하는 식이었다.
‘너희도 늙어봐. 세상만사가 다 그래’라는 논리 뒤에는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낸 건 내가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야’라는 말이 붙었다. 순간 이 논리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집에 와서도 그게 뭘까 생각했었다.
그게 활동지원사가 해야할 일이라도 누군가 냄새를 참으며 내 뒷처리를 한다는 건 미안한 일이고 그래서 주지 않아도 될 추가 비용을 아마도 매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미안한 표정으로 쥐어줬다는 것이 어떻게 자존심으로 연결되는 걸까?
‘세상만사가 다 그래서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게 내 신세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충분히 살아야할 존재라도 믿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내가 해석해낸 경순님이 말한 ‘자존심’이란 이런 뜻이었다.

- 사진의 맨 앞 양쪽에 휠체어를 탄 활동가들이 바로 성선과 은선님이다.

이 ‘자존심’이란 말 뒤에 이어지던 장면 또한 며칠이고 생각났다. 성선님이 ‘엄마 눈 잘 안보이잖아. 지금은 어때?’라고 묻자 예의 그 심드렁한 투로 ‘은선이도 보이고, 성선이도 보이고, 저기(아마도 카메라맨)도 보이고…‘라고 했다. 그때 은선님이 ‘성선이 울어?’라고 말했고 그때 경순님의 표정이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런 표정이 된다. 이때 영상이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경순님 얼굴에 그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이 사라진다.
‘보인다매!’라고 울면서 따지는 성선님과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침묵하는 경순님. 이 장면은 공연을 본지 한달지 지난 지금까지도 떠올릴 때마다 내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한다.
극장에서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든 생각은 ‘경순님은 참 강한 사람이구나’였다.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쌍둥이 두 딸이 가졌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들었을 때 낳은 걸 후회했다고 그녀는 영상 초반에 말했다.
후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두 딸을 책임지고 키워냈다. 일찍 남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힘으로 키워냈다. 애초에 자신은 원치 않은 임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이 낳은 두 딸을 사랑으로 키워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바로 그녀가 말한 ‘자존심’에서 시작된 걸까 짐작해본다.
절대 세상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달관한 태도를 바꾸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영상의 경순님을 보며 들었다. 그 태도가 딸의 눈물 앞에서 무력해지는 걸 봤을 때 나는 경순님이 두 딸 앞에서는 언제나 한없이 약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금 같이 시큰둥하고 달관한 태도로 세상을 믿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강해질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어온 장애여성으로서의 삶, 샤르코-마리-투스 병이 왜곡시킨 삶을 연이어 살아내야 할 두 딸의 삶 앞에 절망하기도 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걸고 두 딸들을 지켜냈다. 그건 그녀가 말한 바로 ‘자존심’에서 나온 힘이었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기존의 연극의 문법으로는 줄 수 없는 감동을 춤추는허리는 그 배우이 가진 장애로 인해 태생적으로 가졌다는 걸 직접 보고 오니 실감할 수 있었다. 글로 접하는 것과는 또다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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