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주 교수의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매체이론 논문 리뷰
유현주 교수가 키틀러를 주제로 연구한 다음 두 가지 논문은 나에게 컴퓨터와 글쓰기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타자기의 등장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켰는지, 특히나 이것이 어떻게 남성중심적 ‘글쓰기를 둘러싼 신화’를 해체했는지 연결되는 지점이 놀랍다. 튜링 기계에 대한 해석도 그동안 컴퓨터공학 관련 도서에서는 접하지 못하는 해석이라 놀라웠다.
글쓰기 혹은 데이터 프로세싱 기술의 계보학 -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매체이론
타자기는 기록시스템 1800 시대 문자에 부여되었던 형이상학적 의미로부터 텍스트를 단순히 기호의 조합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오랫동안 인간의 언어와 글에 부여되어 왔던 심오한 정신성의 가상을 붕괴시키고, 언어란 임의적인 기호들의 조합에 다름 아님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문자독점시대 언어에 부여되었던 정신의 가상이 타자기를 통해 해체되고 난 후 언어는 탈정신화된 기표의 연쇄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타자기는 컴퓨터의 원형인 튜링 기계가 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튜링 기계는 기본적으로 기호를 조작하는 기계다. 이 기계는 무한하게 긴 것으로 상정된 종이띠 위로 헤더를 이동시키는 장치로 구상되었다. 여기에서 헤더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종이띠 위에 있는 숫자나 기호를 읽고 쓰거나 지울 수 있었다. 방향 혹은 이동을 의미하는 기호들로 짜인 명령을 통해 이 기계는 덧셈 및 곱셈과 같은 연산은 물론 일정한 질서를 갖는 수열을 만들어 내었다. 키틀러에 따르자면 튜링 기계로의 발전이 가능했던 건 그것이 타자기보다도 더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 타자기[튜링 기계]가 갖춘 것이라곤, 프로그램이자 동시에 데이터 저장소이고, 입력이자 출력이기도 한 종이띠뿐이었다. 튜링은 일반적인 타자기의 페이지를 이러한 일차원의 띠로 축소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의 기계는 타자기 자판이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많은 글자, 암호, 기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기계는 단 하나의 기호와 그 기호의 부재, 곧 1과 0만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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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언어의 탈정신화는 타자기와 함께 시작하여 컴퓨터와 더불어 그 최종 단계에 도달한다. “숫자와 오퍼레이션 기호들, 데이터와 명령 사이의 구별이 폐기된”14 컴퓨터 언어에서 언어는 더 이상 해석학적인 의미의 담지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시대에 주도적 언어가 더 이상 의미의 담지체가 아니게 되면서 결국 이러한 인식은 문장들로 이루어졌던 문학의 종말로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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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는 특정한 시대에 문화를 저장하는 일종의 기록보관의 의미로 기록시스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기록시스템은 하나의 아카이브이자, 역사의 횡단면이며, 이 안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데이터가 저장되고, 진행되고, 전송되고, 혹은 계산된다. 기록시스템 1800은 문자를 사용하여 데이터를 저장했고 이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필터를 사용하여 소음을 배제하였으며, 기록시스템 1900은 모든 데이터를 평등하게 처리함으로써 우리에게 최초로 소음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대신 정보처리 심급으로서의 ‘인간’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이제 디지털 회로는 자동연산능력에 의해 소음과 정보의 위치를 뒤바꾸고, 끝없이 순환하는 완전히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획득하며 인간의 설 자리를 계속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 현재의 모바일 통신집합체와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 그리고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에 대하여 새로운 기록시스템을 기술하는 건 이제 키틀러가 개척해 놓은 연구에 기반하여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매체이론을 확장시킬 후속 연구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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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와 젠더 - 담론의 채널에서 여성은 매체와 어떻게 결합하는가
20세기를 전후하여 등장한 축음기, 영화, 타자기와 같은 아날로그 기술매체는 각각 소리와 빛, 문자로 이루어진 정보의 처리기술을 대표한다. 이들은 문자로 통합되어 저장되었던 정보를 분리시켰으며, 그럼으로써 문자매체를 감싸고 있던 형이상학 또한 파괴시킨다.
“공간적으로 배열된 기호의 집합에서 낱개의 기호를 선택하는”16) 타자기는 작가의 개성이 담긴 손글씨의 연속성을 파괴시켰으며, 문자를 초월적인 기의를 담고 있는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철자들의 조합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자기는 바로 남성의 특권이던 글쓰기를 탈성화(脫性化)한 매체이기도 하다.17)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타자기는 “고전적인 펜의 남근중심주의를 철회”18)시켰다. 이전까지 담론의 생산채널에서 작동하는 문자의 송신과정이 남성저자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면, 이제 여성이 데이터 프로세싱 프로세스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 대가는 물론 어머니-자연-여성의 상실이다. 글쓰기가 초월성의 번역이 아니라 기호들을 조합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전 시대 궁극적 기의에 자리 잡고 있었던 ‘어머니’를 제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19) 대신 이 자리를 채운 것은 직업적인 훈련을 받은 여성타자수였다. 따라서 데이터 프로세싱 기술의 전환기에 이를 주도한 것은 여성으로 기록된다. 문자를 낱낱이 해체하여 철자와 부호들을 자판 위에 나란히 배열시킨 타자기는 글쓰기를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고 현대의 글쓰기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키틀러가 니체의 글쓰기의 예에서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듯이, 타자기는 손과 눈, 그리고 문자들로부터 연결을 해제하여 유기적으로 구성된 장막을 걷어내 버린다는 것이다.24) 더 나아가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유를 분절하여 조합할 기술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로써 훗날 디지털화로 나아갈 매체적 전제조건을 마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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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가 자신의 이론을 통해 기존 문예학에서 중시했던 인간중심적인 가치들, 문학과 천재성, 저자의 권위 같은 전통에 저항하며, 비인간적인 행위자들인 “독서의 음성학적 방식이나 ‘여성 독자의 기능’, 독서개혁 및 대학개혁, 읽기중독에 대한 도서관의 그림들, 히스테리와 글쓴이로부터 저자가 만들어지는 현상”33)을 그려낸 것은 하나의 해방적 움직임이며 여성주의의 관점에서도 학문적 진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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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의 매체이론은 문자독점시대와 아날로그 기술매체의 시대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이미 주저에서부터 디지털 매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곳에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지만, 컴퓨터의 프로토타입을 완성시킨 ‘튜링의 시대’를 둘러싼 기록체계(아마도 ‘기록체계 2000’)에 대해서는 끝까지 공식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떠난 자리에서 키틀러의 논의를 현재화시키는 것은 후속세대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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